1147년, 발락 사태
어디서 유래하였는지, 어떻게 발생하였는지 알 수 없는 괴물 발락(balak). 어떤 개체는 인간의 무기로 뚫을 수 없는 단단한 외피를 가지고 있었고, 어떤 개체는 인간의 지식으로 분석할 수 없는 지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세계로 쏟아져나온 발락에 의해 인류는 1년 만에 전체 인구의 70%를 잃게 됩니다. 궁지에 몰린 이들은 세계 곳곳에 방주라 불리는 대피소를 세웠고, 두터운 방주의 벽은 몇 남지 않은 인류를 보호했습니다. 하지만 발락에 대적할 수 있는 힘은 존재하지 않았고 인류는 방주 밖을 갈망하면서도 하염없이 고여 죽어갔습니다.
발락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또 나타났으므로 방주와 방주 사이의 교류는 단절됩니다. 과거 인류가 이룩했던 문명이 무너지자 각 방주의 수뇌부를 제외한 일반 사람들은 더 이상 다른 방주의 이들과 소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방주는 발락으로부터 내부를 지켰으나 그 안에서 오갈 데 없어진 인간들의 삶은 메말라갔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두고 자주 다툼이 일어났으며, 방주 곳곳에서 비윤리적인 일들이 성행합니다. 인간은 더 이상 희망을 품지 않게 되었습니다.
1250년, 발락 사태로부터 약 100년 후
방주 밖 세상의 모습은 오래된 기록과 구전 속에만 겨우 남았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몇몇 인간은 밖을 갈망합니다. 인류가 절망에 잠식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탓에 그런 이들의 수는 극히 적었으나 마음은 쉽게 꺾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겪지 못한 밖을 그리워했습니다. 기억에 없는 풍경을 추억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때에 사건이 발생합니다. 일부 인간이 특별한 능력을 깨우치게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인간을 초월하는 근력이 생기기도 하고, 원소를 다루거나 염력을 사용하는 등 발락과 맞설 수 있는 능력이 발현됩니다. 그야말로 ‘기적’. 사람들은 능력을 얻은 인간을 ‘베가(Pekah)’라 부르며 칭송하게 됩니다.
베가의 힘은 발락의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에는 부족했지만, 한 번 잃어버렸던 희망을 되찾게 하는 데에는 충분했습니다. 베가들의 헌신에 의해 다시금 방주 간 연락이 재개되고 교류가 이어집니다. 결과적으로, 베가들은 일반인으로 하여금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 되었으며 곧 ‘특별한 노력’을 통해 직접 베가가 되려는 이들 또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베가 발현 조건에 대해 뚜렷한 공통점이 존재하지 않으며 인위적인 조치로는 이능력을 얻을 수 없다는 ‘공식적인’ 연구 결과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암암리에 불법적이고 검증되지 않은 시술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런 시술이나 실험의 폐해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나 극히 일부는 베가로 발현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운이 나빴던 점은, 이들 때문에 베가가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다양한 미신이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1281년, 현재. 베가의 첫 등장으로부터 약 30년 후
첫 발현자 발견으로부터 30년이 흐르는 동안 베가의 수는 차차 늘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류는 여전히 방주 안에 고립되어 있습니다. 상황이 다소 나아졌다고는 하나 언제 발락이 나타나 위협받을지 모른다는 공포는 이전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발락의 수 또한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인류는 다시금 절망적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로 최근의 일입니다.
「케리그마(Kerygma)」. 그렇게 일컬어지는 이 고서는 두니아의 어느 망가진 방주 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다양한 발락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메커니즘은 아무도 밝혀내지 못했으나 효과만은 분명합니다. 케리그마의 내부에 기록된 발락은 곧 일반적인 들짐승 수준으로 약화되었으며 이능력이 아닌 평범한 무기로도 쉽게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이 괄목할만한 발견에 각 방주의 수뇌부는 결단을 내립니다. 케리그마를 완성하여 발락과의 오랜 전쟁을 끝낸다. 그 일념만으로 고서의 존재를 대중에게 공개하게 됩니다. 또한, 케리그마를 완성할 베가를 육성하기 위해 방주 《아이에나》의 교육 겸 연구시설인 ‘우르(Ur)’로 아이들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